영하 1.8도까지 떨어지는 남극의 칠흑 같은 깊은 바닷속, 얼음처럼 찬 물결을 헤치고 한 물고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느러미를 부드럽게 흔드는 이 생물은 붉은 피 대신 무색 투명한 혈액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붉은 적혈구도, 산소를 날르는 색소도 없는 이 기묘한 생명체는 어떻게 이 얼어붙을 듯한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요?
이 수중 생물의 정체는 척추동물문(Chordata) 조기어강(Actinopterygii) 농어목(Perciformes) 남극어아목(Notothenioidei) 큰지느러미빙어과(Channichthyidae)에 속하는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입니다 [1]. 영어로는 ‘오셀레이티드 아이스피시(Ocellated icefish)’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물고기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척추동물 중 유일하게 적혈구와 헤모글로빈이 전혀 없는 매우 특별한 혈액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1, 3, 5].
피가 전혀 없다는 소문,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를 둘러싸고 가장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는 이 물고기의 몸속에 ‘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입니다 [2][3]. 하지만 이는 명백한 사실과 다릅니다. 눈표범빙어 역시 정교한 혈관 체계와 수송용 액체인 순환 혈액을 몸속에 풍부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2][3].
다만 붉은색을 띠는 세포인 적혈구와 산소 결합 단백질인 헤모글로빈(hemoglobin)이 없을 뿐, 혈액의 액체 성분인 혈장(plasma)이 혈관을 따라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2, 3, 5]. 적혈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피가 붉지 않고 무색 투명하게 관찰되는 것입니다 [3][5].
또 다른 흔한 오해는 성체 전체가 유리처럼 투명하여 내부 심장이나 장기가 훤히 비쳐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1][3]. 어린 치어 시절에는 몸이 매우 투명하지만, 성체로 자라면 피부에 회색빛 색소가 나타나고 체측면에 어두운 눈모양 반점과 가로 줄무늬가 배열됩니다 [1][3]. 피부가 단단히 덮여 있기 때문에 성체의 내부 심장이 유리를 통해 보듯 훤히 비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1][3].
붉은색을 버린 유전자와 남극 바다의 숨은 기적
그렇다면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는 어쩌다 산소를 운반하는 핵심 단백질인 헤모글로빈을 잃게 되었을까요? 과거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체내 헤모글로빈 합성이 완전히 중단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5]. 일반적인 척추동물에게 헤모글로빈의 상실은 즉각적인 질식과 사망을 의미하지만, 남극 바다의 독특한 물리적 환경이 이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3][5].
눈표범빙어는 남극 반도, 사우스셰틀랜드 제도, 사우스오크니 제도, 스코샤 호, 그리고 웨델해 등 남극해 연안에만 살고 있는 고유종입니다 [1]. 수심 0m에서 1,000m 사이 바다에 분포하지만 주로 수심 200m에서 400m 깊이의 해저면에 서식하며, -1.8℃에서 +1.5℃ 사이의 극저온 환경에서 평생을 보냅니다 [1].
기체가 액체에 녹아드는 성질은 기온과 수온이 낮을수록 강해집니다. 따라서 극도로 차가운 남극 해수에는 용존 산소, 즉 물에 녹아 있는 산소의 농도가 매우 높습니다 [3][5]. 여기에 차가운 수온 덕분에 눈표범빙어 자체의 대사율(신체 에너지 소비 속도)도 매우 낮게 유지됩니다 [3][5]. 그 결과, 적혈구라는 전문 수송선이 없어도 혈액의 액체 성분인 혈장 속에 직접 녹아든 산소만으로도 충분히 세포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5].

거대한 심장과 5배의 순환량이 만든 생존 시스템
하지만 적혈구가 없다는 것은 혈액 한 방울이 담을 수 있는 산소의 양이 훨씬 적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의 신체는 대대적인 재설계를 거쳤습니다. 비슷한 크기를 가진 온대 지역의 붉은 피 물고기와 비교했을 때, 눈표범빙어는 훨씬 거대한 심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5][6].
이 거대한 심장은 체내의 무색 혈장을 강력하게 펌프질하여, 동급 어류 대비 약 5배에 달하는 높은 혈액 순환량을 만들어냅니다 [5][6]. 또한 온몸에 풍부하고 빽빽하게 발달한 모세혈관망을 통해 산소를 머금은 혈액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신속하게 흐릅니다 [5][6].
심장 근육 내부의 단백질 구성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됩니다. 큰지느러미빙어과의 일부 다른 종(예: Chaenocephalus aceratus)은 헤모글로빈뿐만 아니라 심장 근육의 산소 저장 단백질인 미오글로빈(myoglobin)마저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5][6]. 그러나 눈표범빙어는 심장 심실 근육에 미오글로빈 단백질이 지속적으로 발현되는 ‘Hb⁻ Mb⁺’ 형태의 생리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5][6].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치밀한 생물학적 연쇄 작용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적혈구를 잃었지만[3][5], 산소 용해도가 극대화된 극저온의 남극 바다[3][5]와 동급 어류의 5배에 달하는 혈액 순환량을 감당하는 거대한 심장[5][6], 그리고 심실에 남아있는 미오글로빈 단백질[5][6]이 완벽하게 맞물린 것입니다. 산소 수송 능력이 떨어진 혈액의 한계를 거대한 심장 펌프와 극저온 환경이 완벽히 메워줌으로써, 극단적인 신체 변화 속에서도 생명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얼지 않는 피와 비늘 없는 피부의 합작품
영하 1.8℃까지 떨어지는 바닷속에서 체액이 얼어붙지 않는 것 역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생명체의 체액이 얼면 몸속에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생겨 세포막을 파괴하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는 혈액 속에 결빙 방지 당단백질(AFGP, Antifreeze Glycoproteins)이라는 특수한 부동 단백질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4][7]. 이 단백질은 체액 안에서 아주 작은 얼음 결정이 생겨나는 순간 그 표면에 결합하여 결정이 더 크게 자라나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아냅니다 [4][7]. 덕분에 영하 1.8℃의 얼음물 속에서도 체액이 얼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합니다 [4][7].
산소 흡수를 한층 높이기 위한 또 다른 비결은 매끄러운 피부입니다. 눈표범빙어는 몸에 비늘이 전혀 없으며 피부가 매우 매끄럽고 얇게 발달해 있습니다 [4][7]. 아가미 호흡 외에도, 이 얇은 피부를 통해 해수 속에 녹아 있는 산소가 직접 수동적으로 스며드는 피부 호흡을 수행함으로써 체내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보완합니다 [4][7].

얼음 바닥에 둥지를 트는 부성애
남극해의 혹독한 환경에서 생명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과정에서도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의 독특한 행동이 관찰됩니다. 번식기가 되면 성숙한 수컷의 몸에 특별한 형태적 변화가 찾아옵니다 [8]. 수컷의 뒷지느러미 끝부분에 혹 모양의 독특한 구조가 새로 발달하는 것입니다 [8].
수컷은 이 혹 모양 지느러미 구조를 활용해 해저면의 모래와 자갈을 쓸어내며 평평하고 깨끗한 둥지를 만듭니다 [8]. 암컷이 산란을 마치면 수컷은 둥지 곁을 떠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리를 지키며 포식자로부터 알을 보호합니다 [8]. 차디찬 남극 바다 밑바닥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부성애는 눈표범빙어 종족이 번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현재 눈표범빙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서 평가 미비(Not Evaluated, NE) 상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 남극해라는 극지 야생 환경의 접근성 한계로 인해, 야생에서의 수명이나 개체수 변동에 관한 장기 측정 데이터는 제한적인 편입니다.
투명한 혈액을 뿜어내는 남극 바다의 생존자
다시 영하 1.8도의 차가운 남극 바닷속으로 돌아와 봅니다. 어두운 해저면을 부드럽게 헤엄치는 눈표범빙어(Chionodraco rastrospinosus)는 붉은 피가 전혀 없는 몸으로 어떻게 차디찬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붉은 색소인 헤모글로빈을 잃었지만 풍부한 용존 산소를 머금은 남극 바다를 만났고, 일반 어류보다 5배나 많은 혈액을 퍼올리는 거대한 심장과 결빙 방지 당단백질, 그리고 비늘 없는 피부를 통한 피부 호흡으로 극한의 추위를 이겨냈습니다 [3, 4, 5, 6, 7]. 여기에 혹 모양 지느러미로 바닥을 쓸어내며 알을 지켜내는 헌신적인 부성애까지 더해져 있습니다 [8]. 붉은 피 대신 무색 투명한 혈액을 순환시키며 살아가는 이 놀라운 어류는, 오늘도 얼어붙은 남극 바다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당당한 생존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대표 이미지 출처
TaxonGuru 제작 · AI 기반 대표 설명용 재현 이미지 · 실제 관찰 사진 아님 · 생성일 2026-09-03
자료와 편집 원칙
이 글은 공개된 학술·기관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주요 사실은 아래 참고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편집 및 팩트체크 정책과 AI 활용 정책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오류 제보: kjhtime@gmail.com
참고자료
- gbif.org — www.gbif.org, 확인일 2026-09-03
- facebook.com — www.facebook.com, 확인일 2026-09-03
- popsci.com — www.popsci.com, 확인일 2026-09-03
- polar-ice.org — polar-ice.org, 확인일 2026-09-03
- biologists.com — journals.biologists.com, 확인일 2026-09-03
- oup.com — academic.oup.com, 확인일 2026-09-03
- calacademy.org — www.calacademy.org, 확인일 2026-09-03
- nih.gov — pmc.ncbi.nlm.nih.gov, 확인일 2026-09-03


